클라스가 다른 중국 삼국시대의 4대 대전
by 공병포반장 | 18.04.30 05:05 | 2,300 hit

중국 삼국시대의 4대 결전은 官渡(관도)의 싸움, 赤壁(적벽)의 싸움, 夷陵(이릉)의 싸움, 五丈原(오장원)의 싸움이 지목된다.
그 중 7만 대 70만을 기록했던 전설적인 전투 관도대전에 대해 알아보자.






후한 말기 화북의 2대 세력인 조조와 원소의 전쟁으로 적벽대전, 이릉대전과 더불어 삼국지를 대표하는 대전 중 하나.


적벽대전이 본격적으로 삼국의 형세를 갖추고, 이릉대전이 위-오-촉의 영토 확정과 더불어 강-약-약으로 대변되는 삼국간의 국력의 차이를 만들었다면,
관도대전은 삼국 시대가 진행되는 동안 조조가 다른 군벌들에 비해 압도적인 세력권을 형성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전투다.
사실상 관도대전을 승리하면서 위나라 건국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해도 무방하다


공손찬을 섬멸하고 하북을 평정해 최강이 된 원소와 황제를 끼고 명분을 마련했던 조조와의 결전은 필연이었다.
당시 원소 세력은 기주, 유주, 병주, 청주의 4개 주를 차지하고 있었고, 조조 세력은 연주와 서주, 예주, 사예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소는 4개 주의 기반을 모두 튼튼하게 다지고 있었던 반면, 조조는 유비에게서 막 서주를 빼앗은 데다,
서주는 조조가 벌인 대학살로 인해 초토화됨은 물론 조조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었으며
예주는 원소의 정치적 커리어가 시작된 곳으로 원체 원소빠들이 득시글거리는 지역이라서 예주 전 지역이(…) 원소의 부추김에 호응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사예 지역 역시 동탁에 의해서 초토화되었기에 조조는 사실상 연주 하나만의 전력으로 원소의 4개 주에 맞서야 했던 셈이다.






그 뿐만 아니라 조조는 원소와 동맹을 맺은 유표와 유비의 뒤치기까지 견제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 원소는 북방의 이민족들을 포섭하여 배후의 위협을 줄이고, 오히려 오환족 등의 기마민족을 자신의 군사력으로까지 활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표와 동맹을 맺고 유비를 배후로 파견했으며, 예주의 반란을 사주해 단지 양안군 한 개 군을 제외한 예주 전 지역이 원소 진영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천자로 인해 명분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조 측의 유일한 이점이긴 했지만,
원소가 격문을 돌려 조조를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으로 규정한 시점과 조조에 의한 동승 이하 700명의 대숙청사건이 절묘히 겹쳤던 데다
이 동승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비를 원소가 영입했기 때문에 오히려 원소의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직접적인 투입병력은 삼국지연의에서는 70만 대 7만.
사서상으로는 10만 대 1만으로 조조군은 원소군과 10배 이상의 병력차가 있었다.
하지만 배송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에 대해 길게 반박했는데, 아무리 봐도 1만은 구라라는 게 정설이다.
원소가 수십 리에 걸쳐 영채를 구축하며 조조군을 둘러싸려 하자 똑같은 방법으로 맞섰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주 압도적인 열세는 아니었다.
보통 원소군이 10만이었다면 조조군은 4~5만 정도 되었다는 추측이 많다.


일부 삼국지 만화에서는 70만 대 40만으로 조조군까지 대폭 뻥튀기시키기도 한다.
원소군도 7배 튀겼으니 조조군은 10배쯤 튀기죠 삼국지가 무슨 치킨집도 아니고 뭐이리 튀겨대요


원소군의 병력수에 대한 소수의견으로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진세어에서는
당시 원소군이 보병 5만에 기병 8천으로 도합 5만 8천이었다고 비교적 적은 규모로 기록하고 있는데,
손성은 이를 반박했고 주를 단 배송지는 손성의 반박 내용까지 같이 실으면서 개인적인 의견은 피했는데,
조조군 1만설과 마찬가지로 아주 신빙성있게 본 것 같진 않다.





조조가 유비의 서주를 공략하는 틈에 원소군중 일부가 남하해오자
우금이 이를 격퇴하고 악진과 합류해 북진하여 두씨진에서 원소군의 별영을 격파하고,
하무와 왕마를 비롯한 20명의 장수의 투항을 받아내며 양측에 전쟁이 벌어진다.


원소군이 백마에 있는 조조군의 장수인 유연을 공격하자 조조군이 이에 대응하여 서전인 백마, 연진전투에서
원소군의 지휘관 안량, 문추 등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지만,
결국 도하거점인 백마, 연진을 모두 내주며 원소의 도하를 막지 못하고 관도까지 계속 밀려나게 되었고,
관도에서 원소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었다.
함락될듯 말듯한 상황에서도 조조는 6개월 동안이나 잘 버텨왔지만,
외부의 정세는 더더욱 조조에게 나빠지는 데다가 원소의 후방교란으로 인한 보급난까지 겹쳐 그야말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으나,
원소 진영에서 투항해온 허유의 정보 제공으로 조조는 순우경이 지키던 오소의 식량고를 급습하게 되고 결국 원소의 보급선은 불타버리게 된다.


이 여파로 오소의 패배 책임을 두고 분쟁이 벌어진 결과 원소의 부장인 장합이 원소를 공격해 원소군의 진지와 무기고를 불태워버리고 조조에게 투항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원소는 800기의 군사만 이끌고 황급히 달아났고 원소군은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진다.
결과적으로 조조군은 절대적인 열세에 있던 전력으로 원소군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관광시켰으며 이어서 창정에 있는 원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즉 원소는 특기를 발휘하여 상대를 일방적으로 때려잡는 전략적인 판을 만드는 행보까지는 완벽했으나,
특유의 오만함과 독선적인 성향으로 수하장수들의 간언을 번번히 무시하였고
그러면서도 곽도를 위시한 최측근들의 행패는 지나치게 감싸고 돌았으며 이는 허유 및 장합의 귀순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전술적인 몇몇 불안 요소와 배신자를 적극적으로 아군으로 받아들여준 조조에게 패퇴했다.


조조는 자신보다 강력한 적을 상대로 버틴 끈질긴 저항과 오소에서 순우경을 격파한 탁월한 용병술에 원소군의 내분과 그 중 다수의 투항이라는 호재까지 겹치며 승리했다.
하지만 조조는 관도대전 직후 수만 명의 원소군 포로들을 산 채로 생매장해서 또 명성을 깎아먹는다(…).
때문에 관도대전은 서주 대학살과 함께 삼국지 사건 중에서도 최악의 인명참사 2톱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만 몇몇 논자들은 당시 조조가 포로를 관리할 상황이 안되었기에 이런 극단적인 짓을 불사한 거라며 어느 정도는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서주대학살은 그딴거 없다 그러나 인권의 개념이 미약한 고대 시대에서도 장평대전의 대승에서 국가를 위해 포로들을 학살한 백기가 계속 욕을 먹어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할 지라도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뿐이지 그 행위의 잔혹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흔히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고 알고 있는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은 완벽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 추측이 어려우며,
무엇보다 민간인이나 포로학살 언급도 없으니 사망자 규모든 그 무게든 같이 비교하기가 힘든 감이 있다.





이번에 삼국지m에 관도대전이 업데이트 되어서 관도대전에 대해 찾아봤는데 어마어마한 전투가 였던거 같네요.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 오장원대전까지 업데이트 되련지 궁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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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쎈본자크 2018.04.30 19:57
적벽대전이 젤 유명한거 아닌감..? 영화도 나왔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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